가족을 보면 내 질병이 보이네

직장인 김병삼 씨(38)는 고혈압과 협심증으로 치료받고 있다. 김씨는 이번 추석 때 만난 친인척들을 조사해보니 상당수가 혈압이 높거나 고혈압 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주부 이맹숙 씨(47)는 최근 유방암으로 수술을 받았다. 이씨 언니 역시 2년 전 진단받은 유방암으로 투병 중이며, 친정어머니도 유방암으로 사망했다.

 

추석 연휴 기간에 가족들이 가장 많이 나누는 대화 중 하나는 건강이다. 어머니는 당뇨 관리를 잘하고 있는지, 큰형 내외는 건강검진 결과가 어떻게 나왔는지, 뇌졸중으로 입원한 작은아버님 병세는 어떤지….

 

유전은 아니지만 그 가족 구성원이 유난히 잘 앓는 질환이 있다. 말하자면 질병 가계도에 해당하는 '가족력'이다. 최민규 한림대의료원 강남성심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당뇨병, 고혈압 등 성인병은 대부분 가족력에 속한다"며 "내 가족이 잘 걸리는 질환이 무엇인지 미리 파악하고 예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 가족력 질환과 유전은 다르다 

한 가족에서 어떤 질병이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가족력 질환'이라고 한다. 정확하게는 3대에 걸친 직계 가족 중에서 2명 이상이 같은 질병에 걸렸다면 가족력이 있다고 판단한다. 집안에 같은 질환을 가진 환자가 많이 생긴다는 점에서 유전성 질환과 혼동될 수 있지만 가족력과 유전은 엄연히 다르다.

 

유전성 질환은 특정한 유전 정보가 자식에게 전달돼 질병이 발생하는 것으로, 이상 유전자 전달 여부가 질병 발생을 100% 결정한다. 다운증후군, 혈우병, 적록색맹과 같이 사전 검사를 통해 유전될 확률을 예측할 수 있지만 대체로 예방할 방법은 없는 난치성 질환을 말한다.

 

이에 비해 가족력은 '후천적 유전자'라 할 수 있다. 가족력은 혈연 간 유전자를 일부 공유한 것 외에도 비슷한 직업, 사고방식, 생활습관과 동일한 식사, 주거환경 등 특정 질병을 유발하는 환경을 공유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유전정보도 일부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특정 질환 유발인자에 약한 체질을 타고나서 해당 질병이 쉽게 발생할 수도 있지만 이는 결정적인 요인이 아니다.

 

최민규 교수는 "가족력 질환은 생활습관을 바꾸거나 조기 진단으로 적극 치료하면 예방이 가능하거나 적어도 발병 시기를 늦출 수 있다"고 말했다. 가족 중에 어떤 질환이 발병했다면 다른 가족에게 발병할 것을 미리 예측하고 조기 진단과 예방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 가족력 질환은 어떤 게 있나  

가족력과 관련해 관심을 모으는 질병은 고혈압, 제2형 당뇨병, 심장병, 고지혈증, 뇌졸중, 골다공증 등이다. 이들 질환은 생활습관과 관련이 깊다. 유방암, 대장암, 폐암, 갑상샘암, 위암 등과 같은 일부 암도 가족력 질환으로 꼽힌다.

 

부모나 가족 중에 심장병 환자가 있으면 심장병 위험이 다른 사람에 비해 2배 이상 높아진다. 심장병이 발병하는 주요 원인은 흡연, 고지혈증, 고혈압, 비만, 운동 부족 등이 있으며 이러한 요인들과 가족력이 합쳐지면 발병 위험은 훨씬 커지게 된다.

 

당뇨병은 부모 모두 증상이 없을 때보다 한쪽이라도 당뇨가 있으면 자녀에게 발병할 확률이 크게 높아진다.

 

부모 중 한 명이 제2형 당뇨병일 때 자녀에게 당뇨병이 발생할 확률은 약 10~30%다. 환자 형제자매에서 당뇨병이 발생할 확률은 약 10~40%로 알려져 있다. 양친 모두 제2형 당뇨병이 있으면 자녀에게 당뇨병이 생길 가능성은 40%로 알려져 있다.

 

고혈압도 마찬가지다. 부모 모두 정상일 땐 자녀가 고혈압일 확률은 4%에 불과하지만 부모 중 한쪽이 고혈압이면 30%, 양쪽 모두면 50%까지 가능성이 올라간다.

 

◆ 생활환경이 가족력 만들어 

중년 이상 부부들 중에는 남편이 뚱뚱하거나 혈중 콜레스테롤이 높으면 부인도 마찬가지로 비만하고 혈중 콜레스테롤이 높을 수 있다. 이는 부부가 결혼 후에 오랫동안 같이 살면서 서로 식생활 습관이 비슷해지고 운동을 잘 하지 않는 등 좋지 않은 생활습관까지 공유하기 때문이다. 특히 출생 후부터 성인이 되기까지 오랜 기간을 부모 영향을 받으면서 자라는 자녀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기호 제일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부모의 좋지 않은 생활습관이 그대로 자녀들에게 전해지고 결국에는 각종 만성질환들까지 물려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가족력이 있다고 해서 모두 그 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족력이 있으면 주기적으로 건강검진을 하고 올바른 생활습관을 실천해야 한다.

 

◆ 취약 질병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가족력은 자신이 취약한 질병을 미리 알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도움을 준다. 가족력을 알면 식생활 개선을 통해 예방할 수도 있고 발생 시 조기 치료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만약 고혈압 가족력이 있다면 과식, 과음, 짜게 먹는 습관 등이 가족 전체에서 나타나는 사례가 많다. 이때는 식습관을 고치는 것이 고혈압을 예방하거나 혈압을 낮추는 데 꼭 필요하다. 제2형 당뇨병은 비록 유전적인 소인이 강하지만 엄격한 식사요법과 꾸준한 운동, 체중 감량으로 발병을 감소시킬 수 있다. 혈당 조절에도 큰 도움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계가족 중 암 환자가 있으면 40대 이후에는 1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대장내시경, 유방촬영술, 위내시경, 저선량 폐CT, 유전자ㆍ암표지자검사를 실시해 미리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특히 40~55세 이전에 성인병이나 암이 발생한 사람이 있다면 보다 이른 나이에 정기검진을 시작해야 한다.